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러시아 제국/역사 (문단 편집) ==== 니콜라이 2세 ==== ||[[파일:Николай II.jpg|height=240]]|| ||[[니콜라이 2세]]|| 알렉산드르 3세는 1894년 급사했고, 그의 뒤를 이어 장남 [[니콜라이 2세]]가 즉위한다. 니콜라이 2세는 처음에는 젊다는 이유로 조부 [[알렉산드르 2세]]처럼 개혁에 앞장설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으나, 애초에 보수적이기 짝이 없었던 알렉산드르 3세와 그 가정교사에게서 교육을 받은 니콜라이 2세가 개혁적일 리가 없었고, 그는 즉위 직후부터 지방 젬스트보 의원들이 올린 탄원서를 단칼에 내치며 전제군주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문제의 탄원서는 자유주의자들뿐만 아니라 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한 보수주의자들도 참여하여 작성되었기에 입헌군주정이나 공화정 얘기는 나오지도 않은, 매우 온건한 내용이었다. 애초에 당시 자유주의자들도 급진적 개혁은 바라지 않았다.] 새 황제가 제 아버지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은, 꽉 막힌 전제군주라는 것을 깨달은 자유주의자들과 개혁주의적 보수파들은 대단히 실망했으며, 특히 알렉산드르 3세 치하에서 숨죽이고 살았던 자유주의자들의 실망감은 어마어마했다. 결국 니콜라이 2세는 즉위하자마자 자유주의자들과 지방 의회를 잠재적인 적으로 돌렸고, 이들의 불만은 점점 커지다가 [[러시아 혁명|결국 폭발하고 만다.]] 하지만 니콜라이 2세의 행보는 매우 당연한 것이었다. 당시 자유주의자들은 귀족들이 주류였는데, 러시아 황족들 사이에서는 귀족들에게 양보했다가는 제국이 다시 귀족정 국가가 되어 군주가 귀족들의 눈치를 보고, 심하면 [[표트르 3세]]나 [[파벨 1세]]처럼 귀족들에 의해 황제가 갈아치워지는 일이 다시 반복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러시아 제국민들도 '황제가 없으면 귀족들이 다시 농노제를 부활시키고 노동자들을 더욱 심하게 착취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인해 전제정에 오히려 우호적이었다.[* 자유주의 정치인이자 [[러시아 공화국]]의 외무장관 [[파벨 밀류코프]]도 당시의 자유주의를 '귀족적 자유주의(Дворянский либерализм)'라고 칭하며 자신의 자유주의와 선을 그었고, 귀족들은 황제에 의해 패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